어머니의 생신날
예순 일곱의 어머니는 인생의 7할 이상을 고생으로 연명하셨다.
아버지를 만나기 전엔 8남매의 수장으로 외할머니 대신 동생들을 돌보셔야 했고, 결혼 후에는 아버지를 포함한 두 어린 자식의 든든한 후원인이 되셔야 했다.
어릴 적 손버릇이 나빴었던 내가 책상 속의 돈을 소리없이 훔쳤을 땐 양동이 가득 물을 받아 내 몸으로 부으시곤 했다.
주술과도 같은 믿음으로 튕기는 물살과 더불어 세상사 낙이라도 되어줄 법한 자식의 그 못된 짓을 깨끗한 물로 씻어주려고 하셨던 것이다.
아버지의 사업은 예상대로 잘 되질 못했다.
허황함이 많았던 아버지가 어머니의 예지력을 믿고 잘 따라만 주었어도 사업 실패로 인해 고향과도 같은 그곳을 떠날 이유는 아예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고난은 이미 내 나이만큼 이어져 왔거늘 하늘도 무심하시지 강릉에 오시자마자 자그마한 공업사 옆에 식당을 차리셨다.
공장을 드나드는 이들의 먼지 낀 속을 달래기엔 돼지고기가 최고라며 한 치의 눈금도 속이지 않으셨던 그 눈저울에 손님은 제법 있었지만 홀아주머니를 두고부터는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시간이 계속되었다. 그러고 보니 분기별로 한 번 씩 내야했던 수업료를 가져가지 못할 때면 난 그것이 너무도 창피하여 남대천 강둑까지 어머니의 손에 든 빗자루를 피해가며 도망가듯 학교로 갔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에와서야 추억이지 그땐 수업료를 내지 못한 학생들의 이름이 불려지는 것에 상처를 받을만한 시기였었다.
그러고 나면 다음날 어머니는 학교에 내라고 조용히 작은 편지봉투를 주시곤 했다.
아버지는 지금의 내 나이에 벌써 세상 일을 놓으시고는 힘들어하시는 어머니의 또다른 짐이 되셨고, 한 칸 짜리 식당에 딸린 방에서 우리 남매는 공부를 해야 했다.
기름기 가득한 홀의 상위로 기름기가 흐르면 어머니는 손님이 들어오시는 방을, 난 홀의 상을 열심히 닦곤 했다.
밤 11시가 지나면 식당 안에서 허벅지 정도로 내려진 샷다 사이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것이 그나마 내 유일한 취미였었는데 술취한 아버지의 냄새를 맡기 싫어서라도 최대한 긴 시간을 끌며 홀 의자에 앉아 밖을 내다보곤 했었다.
어머니의 인생은 말로 풀어내기엔 너무도 안타까운 인생이셨고, 아내와 자식 보기가 미안하셨는지 개인 주택 공사장에 간간이 나가시던 아버지는 그예 이층에서 떨어지셔서 다리에 쇠심을 브릿지로 연결해야 했다.
안풀려도 어찌 이리 안풀린다 말인지 삶과 죽음을 습관처럼 말씀하시던 아버지는 여전히 실패한 낙오자의 오명을 스스로 만든 채 살아오셨다.
계약기간을 지키지 않고 쫒아낸 주인 양반의 그 오만방자함을 내 기필코 갚아주리라 다짐하며 우리 가족은 새로운 보금자리인 부흥마을로 터전을 옮겨야 했다.
강릉의 유명한 변호사 집의 두 아이를 키우며 식모 생활을 하신 어머니 덕분에 동생과 난 그나마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있었다.
그렇게 힘들게 힘들게 사시던 어머니는 한푼이라도 아껴 집을 장만해야겠다 생각하셨나보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로 기억되는 데 우린 드디어 13평 짜리 임대아파트에 입주를 하고는 몇 년 뒤 아버지의 이름으로 분양받기에 이르렀다.
그 집은 여전히 부모님의 안식처로 남아 지금도 굳건히 살고 계시고, 난 결혼 전까지 그곳에서 나의 방을 가지며 지내기도 했다.
그런 어머니께서 몇년 전 장상피화생으로 인한 위 변형 진단, 갑상선 3기, 류마티스 관절염의 그 고통까지 떠안으신 채 지금까지 살아오셨다.
그리도 귀여워하는 손주가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살아도 원 없겠다 말씀하셨던 그 모지락스러운 말이 그리도 듣기 싫었는 데 글도 지금은 많이 나아지셨다.
예순 일곱. 출생신고가 잘못되어 동생보다도 적게 등본에 기록되었지만 이제 곧 칠순이 다 되어가신다.
비쩍 마른 자식의 모습이 안스러운지,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라도 날 것처럼 느껴지셨는 지 늘 자식 걱정에 이른 잠을 청해보지도 못하셨던 어머니.
오늘은 바로 내 어머니의 생신날이다.
아내는 이른 아침부터 엊저녁 준비 못한 나머지 음식들을 서둘러 조리했고, 이제 곧 중학생이 될 딸아이는 퉁퉁한 몸매와는 달리 아주 섬세하게 베이컨쌈과 무쌈을 만들었다.
간편하게 식당에서 먹어도 될 법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내가 무조건 준비하겠다는 말에 우리도 늙어가는구나 싶은 생각이 가슴 가득 뭉클하게 일어났다.
초등학교교사인 여동생은 귀여운 조카 수민이에게 재미있는 노래를 가르쳤는 지 생신이벤트로 재미있는 전래동요를 읊조리고, 그에 질새라 재민이는 좀더 정확한 발음으로 동요를 불러 제낀다. 아들은 개다리춤을 시작으로 막춤을 춰댔지만 어머니의 입가로 번진 그 환한 미소는 몇 년, 아니 몇 십년 만에 보는 흐드러진 꽃과 같았다.
어머니, 다시 한번 생신 축하드리고 우리 오래도록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