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아이 - 강릉 선교장에서
얇게 저민 얼음바닥 하나 이기지못해 나자빠지다가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지나는 이 눈에라도 띄었으면 그 쪽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아픈 표정 하나 짓는 일도 쉬울 일이 아니겠지만
미끌려 자빠진 엉덩이가 다리 길이만큼 밀려나가다 움푹 패인 눈더미 속으로 쏙 빠져버린다.
눈 오는 날 가벼운 객기에 쉽게 눈에 띄는 나의 모습이다.
강산이 네 번 하고도 반은 바뀌기 전 겨울.
세상에 나와 벗 한 지도 어느덧 오랜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지리하게, 그리도 억세게 내리던 열흘 이상의 폭설에 도심이 마비되어 버렸지만
뭐그리 당당하게 맞서 이길거라고 모자도 하나 챙기지 못한 채 집을 나섰다.
서너 대의 차를 대기도 바쁜 널직한 주차장에 온통 허리 높이의 눈이 덮여 있었어도 선교장은 문을 열었드랬다.
오호! 내 오늘 너와 맞대면에 선교장을 벗삼아 한 시간 쯤 놀아보자.
[겨울아이 - 폭설의 하루 강릉 선교장에서]
강릉에라도 오게 되면 늘 가볼만한 곳으로 추천되는 곳이기도 한 선교장.
그 역사의 흔적을 훑고 가보는 것도 나름 의미있으리라.
오죽헌과 경포권을 사이에 두고 위치해 있어 당일방문코스로 가볼만한 곳이다.
(오죽헌 - 선교장 - 참소리축음기박물관 - 경포호 - 경포습지 - 허균생가터)
http://www.knsgj.net/ 강릉선교장
효령대군(세종대왕의 형)의 11대손인 가선대부(嘉善大夫) 무경(茂卿) 이내번(李乃蕃)에 의해 처음 지어져 무려 10대에 이르도록 나날이 발전되어 증축 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99칸의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상류주택으로서 1965년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 5호로 지정되어 개인소유의 국가 문화재로서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300여년동안 그 원형이 잘 보존된 아름다운 전통가옥으로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미를 활달하게 포용하여 조화를 이루고 돈후한 인정미를 지닌 후손들이 지금가지 거주하는 살아숨쉬는 공간이다.
따라서 한국의 유형 문화재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뿐 아니라 강릉문화를 대표하며 경포 호수권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에 전통문화 시범도시인 강릉시의 문화 관광 자원으로서 부각되었다.
하늘이 족제비 무리를 통해 점지 했다는 명당터인 선교장은 300여년전 안채 주옥을 시작으로 동별당, 서별당, 연지당, 외별당, 사랑채, 중사랑, 행랑채, 사당들이 지어졌고 큰대문을 비롯한 12대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대장원을 연상케 한다. 입구에는 인공 연못을 파고 정자를 지어 활래정(活來亭)이라 이름을 짓고 연못과 함께 경포호수의 경관을 바라보며 관동팔경 유람하는 조선의 선비와 풍류들의 안식처가 되었다.만석꾼 곳간채에는 항상 곡식이 가득하여 흉년에는 창고를 열어 이웃에게 나누어주며 베푸는 집안의 표상이 되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경포호수를 가로질러 배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 다녔다하여 선교장 이라고 지어진 이름 이지만 그 호수는 논이 되었고 대장원의 뒤 야산에 노송의 숲과 활래정의 연꽃 그리고 멀리보이는 백두대간 사계절 변화의 모습을 바라보는 운치는 한국 제일이라고 하겠다. 2000년을 기해 한국 방송공사에서 20세기 한국 TOP 10을 선정할 때 한국 전통가옥 분야에서 한국최고의 전통가옥으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