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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접사

안인진 설경

몇년 전 허리까지 차올랐던 눈더미에 바다로 난 도로가에 차를 던져놓고는 집으로 돌아갈 길이 없어 근처 모텔에 투숙한 적이 있다.

얼마나 내리고 있는 지 분간조차 힘든 상황에서 인적이 없는 곳을 찍어야 한다는 객기가 부른 난감함이었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그곳을 가서도 안되거니와 가봤자 돌아오지 못할 길을 뻔히 가고 있다는 것이 그날 일기 상태였으니

한 자리수의 가능성만 보고 달려간 나에게 벌어질 일은 뻔하디 뻔한 일이었다.

온 몸이 젖도록 삽질을 하고 파낸 이상의 눈을 치우며 앞으로 나아가긴 했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호된 추위와 허기 뿐이었다.

아마도 친구의 만류가 아니었더라면 난 그 자리에서 어떤 변고를 당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 이후 내 고장 강릉엔 그다지 많은 눈이 내리지 않았고, 눈 사진이라도 촬영하려고 맘을 먹으면 높은 산이라도 올라가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다 올해 1월을 채 보내기도 전에 제법 많은 눈이 내렸다.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앞을 보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그다지 심각하다 느낄 정도의 대설은 아니었는 데 일기예보로는 대설경보가 내려지고 있었다.

 

몇년 전의 쓰라린 추억이 떠오를 법도 했건만 조용히 차를 몰고 늘 가던 작은 바닷가를 찾았다.

항으로 들어가는 작은 고뱅이만 신경 써서 올라가면 될 일이었기에 그다지 긴장감이 파오르지도 않았다.

작은 언덕길 꼭대기에 봉고차 한 대가 비틀거리고 주위에 사람들이 열심이 눈을 치우고는 차를 밀고 있었다.

 

'작은 일이라도 미리 준비를 했으면 됐을 것을.....'

 

천천히 기어 오르는 속도로 차가 빠진 뒤 언덕길을 그녕 넘어 버렸다.

작년까지는 사흘이 멀다 하고 찾아온 곳이었지만 근래는 이런저런 일들이 겹쳐져 오랜만에 와 보게 되었다.

모자라도 하나 써야 할 정도의 눈발이 갈기갈기 나를 후려치고 해양파출소 안에서는 방파제며 바다쪽으로 나가는 이들을 제지하고 있었는 데

사실 그 상황에서 바다로 나간다는 것이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었을 터, 그래도 눈치를 보며 방파제를 뚫고 나가려니 뒤에서 소리가 들린다.

 

"이봐요. 경보가 내렸는 데 어딜 나가요. 얼른 들어와요."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니 좀 잔잔해지는가 싶던 눈발이 다시금 요동을 친다.

 

"그럼 여기서 몇 장 찍을게요. 안될까요?"

 

자세히 보니 앞머리가 다 벗겨지셨어도 여전히 동안의 피부를 유지하고 계신 처 사촌오빠가 계신다.

진해의 작은 경비정장을 하시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셨다는 데 하필 이곳 안인지소로 오시다니 묘한 웃음이 실실 흘러나온다.

 

지소 안에서 따뜻한 커피를 한 잔 하며 담소를 나누고 보니 벌써 저녁시간이 다가온다.

엊그제 사 둔 두부를 꺼내어 내가 좋아하는 두부조림을 달콤짭조름하게 해놓겠다던 아내의 말이 떠오른다.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 되돌아가려고 하니 아까 올라온 언덕길로 탑차 한 대가 미끄러지기를 여러 번 반복하더니 길가 구석으로 내동댕이 쳐진다.

쇠사슬로 엮은 바퀴가 유난히 힘이 없어 보인다.

이렇게 눈이 갑작스레 많이 내릴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지 않았나 보다.

꼭 일년 전 습관처럼 시기가 되면 구입해 둔 직물체인으로 난 그곳을 쉽게 벗어난다.

 

설치하기도 쉽고 그 성능을 가히 믿고 있기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나 일단 한 번 쓰고 나면 그 겨울을 보내며 함께 쓰레기봉투로 담겨져 버려져야 하는 직물체인을 탈탈 털었다.

아파트 앞으로 내린 눈을 치우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아침엔 관리소 직원 서너 분이 나와 열심히 주민들을 위한 길을 열어놓곤 했었는데 작은 통로로 높다랗게 세워진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라 그런 지 자기 일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흔치 않다. 

눈이 오면 각자가 부담한 관리비로 용역을 주어 눈이 그치면 바로 제설작업에 들어가겠지.

 

사실 난 안다. 아파트 주민들도 모두 아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알지만 당장 내가, 내 자녀들이 지나가야 할 길을 쉽게 열려고 하지 않는다.

 

눈 오는 날 잠시 바다를 다녀와 문득 사람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0121 안인진 설경]